분류 전체보기54 마르키스 (열망, 비극, 17세기 프랑스) 매춘부가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게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1997년 영화 '마르키스'는 그 불가능해 보이는 전제를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와 엮어 완성한 작품입니다. 처음엔 소피 마르소라는 배우가 궁금해서 틀었는데, 보다 보니 그녀의 춤과 눈빛에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단순한 역사 로맨스물이 아닙니다. 열망 — 매춘부에서 무대 위 주연까지영화는 중세 프랑스 유랑극단의 공연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몰리에르(Molière)의 극단이 공연을 펼치는 무대 한쪽에서, 한 여자가 손님을 끄는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마르키스입니다. 춤꾼이자 매춘부. 그런데 그 춤이 범상치 않았습니다.몰리에르는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배우입니다. 희극 작법(喜劇 作法), 즉 인간의 위선과 탐욕을 풍자하는 .. 2026. 7. 11. 홀랜드 오퍼스 (교육자의 소명, 청각장애 아들, 진정한 꿈)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1990년대에 개봉했을 때 꽤 유명했던 작품인데, 사는 게 바빠지다 보니 어느 순간 기억 속에서 지워진 거죠. 그런데 최근 다시 마주했을 때, 첫 장면부터 마지막 지휘봉이 내려오는 순간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 한참을 멍하니 있었어요. "우리가 선생님의 교향곡입니다"라는 대사가 귓속에서 계속 맴돌았으니까요. 교육자의 소명 — 꿈을 미루는 사람의 이야기글렌 홀랜드는 처음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만의 오케스트라 교향곡, 이른바 '아메리칸 심포니'를 완성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고, 교단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습니다. 아내 아이리스와 결혼한 뒤 생계를 위해 잠시 발을 들인 곳이 바로 존 케네디 고등학교였.. 2026. 7. 10. 사랑은 살며시 다가오고 (계약결혼, 가족유대, 진짜사랑) 사랑으로 시작하지 않은 결혼이 가장 깊은 사랑으로 끝납니다. 영화 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는 이 오래된 필름이 어쩌면 그렇게 오래 마음에 남는지,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계약결혼, 생존이 먼저였던 두 사람남편의 장례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웃 남자가 청혼을 건넵니다. 그것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조건을 제시하면서. 딸 미씨에게 여성으로서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 주면 거처와 생활비를 제공하겠다는, 어떻게 보면 냉정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습니다.여기서 이 영화가 묘사하는 것은 이른바 편의결혼(Convenience Marriage)입니다. 편의결혼이란 감정이 아닌 실질적인 필요에 의해 맺어진 결합을 뜻합니다. 19세기 미국 서.. 2026. 7. 9. 일반인의 평범한 이야기 (죄책감, 심리 치료, 관계 회복)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것이 왜 가장 오래 남을까요. 1980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저는 '이게 왜 아카데미상이야?'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달랐습니다.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이 수상 소감을 말하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인생을 살아보고 나서야 가장 평범한 이야기가 가장 어렵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형을 잃은 아이, 죄책감이라는 감옥콘래드는 병원에서 퇴원한 지 한 달 반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일상이 낯섭니다. 그는 보트 사고로 형 벅을 잃었고, 그 사고에서 자신만 살아남았습니다. 생존자 죄책감(survivor's guil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같은 사고에서 자신만 살아남았을 때 "왜 나만 살았을까"라는 자책과 수치심이 뒤엉키는 심리 상.. 2026. 7. 7.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휴 그랜트, 로맨틱 코미디, 캐리) 1994년 개봉한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은 영국 로맨틱 코미디 역사상 가장 높은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전 세계를 웃기고 울렸습니다. 저는 휴 그랜트 출연작 중 이 영화를 단연 첫 손에 꼽는데, 처음 봤을 때 그 어눌하면서도 소년미 넘치는 모습이 어찌나 인간적으로 느껴졌는지 지금도 선명합니다. 휴 그랜트와 찰스, 그 어눌함이 왜 매력인가혹시 영화를 보면서 "저 사람, 왜 저렇게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못 말하지?" 하고 답답했던 적 있으신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찰스라는 캐릭터는 그 답답함 때문에 오히려 더 사랑스럽습니다.영화는 첫 장면부터 펀치를 날립니다. 신랑 들러리를 맡은 찰스가 늦잠을 자고, 결혼 반지까지 놓고 오는 소동을 벌입니다. 결혼식 당일 아침부터 이러니 관객은 웃음을 참을 수가 .. 2026. 7. 6. 라붐 (소피 마르소, 헤드셋 명장면, 첫사랑) 혹시 어릴 때 학원에서 나눠준 책받침에 외국 배우 사진이 박혀 있던 거 기억하시나요? 저는 그게 소피 마르소였습니다. 1980년 프랑스 영화 '라붐'으로 전 세계 남심을 흔들어놓은 그 얼굴. 비디오플레이어도 귀하던 시절, 잡지 한 귀퉁이나 책받침으로나마 얼굴을 보던 배우가 드디어 TV 명화극장에 등장했을 때의 그 설렘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라붐이 남긴 것 — 헤드셋 한 장면이 시대를 넘다1980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청춘 멜로 영화 '라붐'은 요즘 말로 하면 전형적인 컴이지 무비(Coming-of-age Movie)입니다. 여기서 컴이지 무비란 사춘기 청소년이 성장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 장르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첫사랑·가족 갈등·정체성 혼란이 한꺼번에 터지는 10대의 이야기죠.주인공 빅은.. 2026. 7. 5. 이전 1 2 3 4 5 ···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