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그냥 톰 크루즈 액션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1992년 개봉한 파 앤드 어웨이(Far and Away)는 아일랜드 소작농 청년과 귀족 아가씨가 미국 땅에서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로, 지금 다시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영화입니다.

아메리칸 드림, 그 시작은 복수였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아마 공감하실 텐데, 조셉 도넬리라는 캐릭터가 처음부터 영웅처럼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지 않나요? 1892년 아일랜드, 조셉은 지주에게 집을 빼앗기고 아버지까지 잃습니다. 그 분노를 복수로 풀겠다며 지주 크리스티의 저택에 잠입하는데, 거기서 운명적으로 크리스티의 딸 쉐넌을 만나게 됩니다.
쉐넌은 단순한 귀족 아가씨가 아니었습니다. 귀족 숙녀의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려 했던 인물로, 요즘 말로 하면 자기결정권(Self-determination)을 강하게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자기결정권이란 외부의 압력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권리를 뜻합니다. 쉐넌이 오클라호마 무상 토지 분배 소식을 듣고 조셉을 설득해 함께 미국행을 결심하는 장면은, 그 시대 여성 캐릭터로서는 꽤 파격적인 설정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도착한 보스턴에서의 삶은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미국이라는 땅에서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상을 뜻하는데, 실제로 19세기 말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마주한 현실은 그 이상과 크게 달랐습니다. 1880년대부터 1920년대 사이 미국으로 건너간 아일랜드 이민자는 약 150만 명에 달했으며, 대부분 하층 노동자로 사회 최하단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이민박물관).
조셉은 이민자 보스 마이클 캘리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맨손 권투, 즉 베어너클 복싱(Bare-knuckle Boxing)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베어너클 복싱이란 글러브 없이 맨주먹으로 싸우는 고전 격투 방식으로, 19세기 미국과 유럽에서 노동자 계층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봤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조셉이 단순히 주먹이 세서가 아니라 잃을 것이 없는 사람 특유의 투쟁심으로 싸운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눈빛은 톰 크루즈가 아니면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조셉과 쉐넌이 보스턴에서 살아남는 방식을 보면, 당시 이민자들의 생존 전략이 얼마나 다층적이었는지 느껴집니다.
- 이민자 커뮤니티(보스 마이클 캘리 네트워크)에 편입해 일자리를 확보
- 베어너클 복싱이라는 비공식 경제 활동으로 수입 창출
- 하인, 막노동 등 최저 생계형 노동으로 기반 마련
이 세 가지가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묘사되는데, 역사적 고증 측면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저는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오클라호마 런, 꿈을 향한 마지막 질주
혹시 오클라호마 런(Oklahoma Land Run)이라는 실제 역사적 사건을 알고 계신가요? 1889년 미국 연방 정부가 오클라호마 준주의 미개척지를 선착순으로 분배하기로 하면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동시에 출발하는 장관을 연출한 사건입니다. 이 토지 경주에 참여한 인원만 약 5만 명 이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처: 미국 역사학회). 영화는 이 실제 사건을 클라이맥스로 끌어들이며,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서부 개척 시대(Westward Expansion)의 역동적인 역사 드라마로 완성됩니다.
서부 개척 시대란 19세기 중후반 미국이 서쪽 미개척 대륙을 개발하고 정착하던 시기를 일컫는 역사적 개념으로, 이 시대는 기회와 폭력,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던 복잡한 시기였습니다. 영화는 그 복잡함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지만, 조셉이 거친 말을 길들이며 경주에 뛰어드는 장면에서 그 긴장감이 충분히 전달됩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바로 이 마지막 경주입니다. 조셉이 질주하다 깃발을 꽂고 쓰러지는 순간, 그 장면에서 저는 진짜 울었습니다. 쉐넌도 같은 땅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는 반전까지 더해지니, 사랑 이야기와 꿈 이야기가 한 지점에서 만나는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폭풍의 질주 이후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다시 호흡을 맞춘 작품이라는 점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두 사람은 1999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 이후로 함께한 영화가 없습니다. 제 경험상 이 두 영화를 연달아 보면, 두 배우의 연기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파 앤드 어웨이에서는 거칠고 생기 넘치는 에너지가 폭발했다면,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는 완전히 다른 결의 심리극을 보여줬으니까요.
다시 이 영화를 꺼내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주저 없이 권하고 싶습니다. 러닝타임이 139분으로 긴 편이지만, 보는 내내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요즘엔 좀 낡은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말이 왜 한 시대를 관통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땅에 깃발을 꽂는 그 장면 하나가, 모든 설명을 대신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