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로맨스 영화라길래 달달한 장면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은 시간 여행이라는 장치를 통해 결국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작품입니다. 로맨스인 줄 알고 앉았다가 삶에 대한 영화를 본 느낌이랄까요.

로맨스인 줄만 알았는데, 이게 삶의 영화였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솔직히 레이첼 맥아담스 때문이었습니다. 출연한다는 것만 알고 별 기대 없이 틀었는데, 1시간쯤 지났을 때 결혼식 장면이 나오는 겁니다. 보통 로맨스 영화라면 결혼식은 엔딩을 장식하는 클라이맥스 아닌가요?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장면을 중간에 배치합니다. 그 순간 '아,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게 사랑 이야기만은 아니구나' 하고 감이 왔습니다.
주인공 팀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시간 여행 능력을 물려받습니다. 여기서 시간 여행이란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던 팀이 직접 실험을 통해 이 능력을 확인하는 장면은, 마치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했을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듭니다. 저도 한 번쯤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기에, 팀의 감정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되돌려도 바꿀 수 없는 것들
팀이 처음 이 능력을 쓰는 방식은 꽤 인간적입니다. 대단한 목표가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한 아쉬움을 되돌리려는 것이었으니까요. 영화는 이 지점에서 인과율(causality)이라는 개념을 조용히 건드립니다. 여기서 인과율이란 어떤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다른 원인이 되는 연쇄 관계를 뜻합니다. 팀이 한 순간을 바꾸면 반드시 다른 무언가가 틀어지는 것이 그 예입니다.
친구 해리의 공연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더니, 처음 만나 어렵게 받아낸 메리의 번호가 사라져 있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이 장면은 보면서 꽤 답답했습니다. 하나를 챙기면 하나를 잃는 구조, 이게 시간 여행 영화의 법칙처럼 느껴지면서도 사실은 현실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매일 무언가를 선택하면서 다른 무언가를 포기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팀이 시간을 되돌려 운명을 조작하려 해도 바꾸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는 점, 이 영화에서 가장 솔직하게 그려지는 부분입니다.
영화 속 시간 여행의 핵심 법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시점으로 돌아가면 아이가 바뀔 수 있다
- 한 사건을 수정하면 연쇄적으로 다른 사건이 틀어진다
- 시간 여행은 타인의 감정까지는 바꿀 수 없다
아버지의 조언, 그리고 내러티브 구조
영화에서 팀의 아버지가 시한부 판정을 받는 장면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버지는 팀에게 멘토(mentor)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멘토란 단순한 조언자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인물을 의미합니다. 팀의 아버지는 자신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 살아온 선배로서, 단순히 슬퍼하는 대신 하루를 두 번 사는 방식을 권합니다.
한 번은 평소처럼, 두 번째는 그날의 소소한 것들을 의식적으로 발견하면서. 이 조언이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말은 들을 때보다 어떤 계기로 체감될 때 비로소 와닿는데, 저도 이 장면에서 그런 체감을 했습니다. 레이첼 맥아담스가 진짜 미칠 듯이 사랑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 장면만큼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도 인상적입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 즉 사건의 배치와 흐름을 의미합니다. 결혼식을 중간에 두고, 후반부를 아버지와의 이별과 삶의 깨달음으로 채운 이 구조는 로맨스 영화의 공식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가 '삶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일상적인 사건보다 감정적으로 강렬한 경험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팀의 아버지가 제안한 '하루를 두 번 살기'는 바로 이 원리를 역이용한 것입니다. 평범한 하루에 의식적인 감정을 부여함으로써, 잊힐 뻔한 순간들을 기억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편집되지 않는 현재를 살아가는 법
이 영화가 아름답기도 하고 한편으로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해답이 너무 단순하게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과거를 바꾸려는 욕망을 버리고, 편집되지 않은 현재를 받아들이라는 메시지. 맞는 말인데, 현실에서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영화는 살짝 가볍게 넘기는 면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불완전함을 수용하지 못하고 평범한 하루의 가치를 잊고 사는 이유가 단순히 의지의 문제만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유효합니다. 만약 오늘 하루를 다시 살 수 있다면, 저는 뭘 다르게 할까요? 아마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덜 보거나, 밥 먹을 때 음식 맛을 좀 더 느끼거나, 그런 아주 작은 것들일 겁니다. 영화가 말하는 것도 결국 그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조금 더 귀 기울이는 것.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카타르시스란 예술 작품을 통해 억압된 감정이 해소되고 정화되는 경험을 의미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잃는 장면, 마지막으로 함께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추억을 쌓는 장면에서 감정이 터지면서 뭔가 정리된 느낌이 왔습니다.
한 심리학 연구에서는 의미 있는 서사(narrative)를 경험하는 것이 삶의 만족도와 연관된다는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이 영화가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은 로맨스를 입구로 삼아 삶의 태도를 묻는 작품입니다. 레이첼 맥아담스가 걷던 런던 거리를 직접 걸어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고, 동시에 보고 난 뒤 조용히 오늘 하루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로맨스 영화라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한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어떤 장면에서 멈추게 될지는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분명 한 번쯤은 잠시 화면을 끄고 생각에 잠기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