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가 서로의 부러움을 털어놓는 장면, 저는 거기서 결국 울고 말았습니다. 한쪽은 과거를 갖고 있고 한쪽은 미래를 갖고 있는데, 정작 둘 다 상대방의 것이 부럽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이 이 영화의 전부였습니다. 1998년작 영화 스텝맘은 재혼·이혼 가정, 이른바 블렌디드 패밀리(blended family)의 현실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블렌디드 패밀리가 마주하는 현실
블렌디드 패밀리(blended family)란 이혼·재혼 과정에서 서로 다른 가정의 아이들이 한 지붕 아래 합쳐진 가족 구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계부모와 계자녀가 함께 생활하는 형태인데, 이 구조가 단순히 '어른들의 합의'로 완성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영화에서 이자벨이 처음 아이들과 마주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저는 솔직히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아침 식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충돌, 아이가 눈길조차 주지 않는 냉담함. 그런데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그 무게를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 주변에도 재혼 가정을 꾸린 지인이 있는데, 아이가 새 파트너를 받아들이는 데만 2년 넘게 걸렸다고 했습니다.
국내 통계를 봐도 이 문제의 무게는 숫자로 확인됩니다. 재혼 가정의 자녀 적응 문제는 갈수록 중요한 사회적 과제가 되고 있으며, 이혼율 증가와 함께 블렌디드 패밀리 형태의 가족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출처: 통계청).
영화 속 애나의 태도에는 단순한 반감 이상의 심리가 담겨 있습니다. 부모 이혼 이후 자녀가 경험하는 애도 반응(grief response), 즉 상실에 대한 슬픔이 분노와 적대감으로 표출되는 현상입니다. 여기서 애도 반응이란 사랑하는 대상이나 관계를 잃었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반응으로, 꼭 죽음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혼·분리처럼 중요한 관계의 단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애나가 엄마와 아빠의 재결합을 원했던 건 그 상실을 되돌리고 싶은 본능이었고, 이자벨의 존재는 그 희망이 영원히 닫혔다는 신호였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특히 주목한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재키가 아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이자벨에 대한 반감을 심어줬을 가능성이 영화 내내 암시된다는 것
- 하지만 재키가 암 진단을 받은 이후, 그녀는 아이들의 감정을 먼저 다독이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
- 이자벨 역시 완벽한 양육자가 아닌, 실수하고 넘어지면서 배워가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
이 세 가지가 이 영화를 '이상적인 재혼 가족'의 판타지로 끝나지 않게 붙잡는 장치입니다.
재키와 이자벨, 두 여자가 나눈 명장면
암 진단 이후 재키의 변화를 보면서 저는 이 인물이 단순한 '전 부인'이 아니라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시한부라는 상황 앞에서 그녀가 선택한 건 싸움도, 포기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이자벨에게 '부탁'하는 일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행동을 유산적 돌봄(legacy caregiving)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유산적 돌봄이란 자신이 더 이상 곁에 있을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자녀의 미래 양육자에게 정보와 감정적 연결고리를 넘겨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재키가 이자벨에게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바로 그겁니다. 그 행동 하나가 얼마나 큰 결단인지,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꽤 오래 멈칫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 장면. 이자벨은 "아이들이 엄마와 쌓아온 과거와 추억을 나는 절대 가질 수 없어서 부럽다"고 했고, 재키는 "아이들의 미래를 너는 함께할 수 있어서 부럽다"고 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게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두 사람이 각자의 상실을 처음으로 언어화하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애나가 결혼할 때 자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봐 두렵다는 재키의 말, 자신이 재키를 기억할지 걱정된다는 이자벨의 말. 둘 다 울먹이면서 그 말을 내뱉는데 저도 같이 울먹였습니다.
아동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이혼 이후 자녀가 안정적으로 적응하려면 '두 가정이 적대 관계가 아님'을 아이가 경험으로 확인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합니다(출처: 한국아동심리치료학회). 재키와 이자벨이 결국 손을 잡는 마지막 장면은 그 심리학적 원칙을 영화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크리스마스 시퀀스는 제 경험상 이런 류의 영화에서 보기 드문 방식으로 마무리됩니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신, 잠든 아이들 옆에서 상념에 잠긴 재키, 카메라를 들고 그 순간을 프레임에 담는 이자벨.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과 미래를 기록할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말 한마디 없는데도 그 구도 하나가 영화 전체를 요약해버립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보호받는 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 영화처럼 어른들이 자신의 아픔보다 아이를 먼저 생각하는 이야기가 더 울립니다. 스텝맘을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그 두 여자가 마주 앉아 울먹이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미 보셨다면, 다시 한 번 그 장면만 찾아보셔도 됩니다. 저는 두 번째가 더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